세상의 모든 진리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모든 질문이 있는 곳, Ask All.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배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넘어서기 힘든 장벽으로 다가옵니다. ‘Ask All’은 그 벽을 허물어 주는 첫걸음이 됩니다. 가볍게 읽는 일주일 한 편의 글로 인문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매주 한 편의 인문학 뉴스레터 받아보기(클릭) 어쩌면 이것은 질투일지 모른다그렇다. 분명 질투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자괴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겠다. 난 인문학 연구자였다. 대학에 기생해서 논문을 쓰고, 책을 쓰고, 연구로 돈을 벌어먹는 사람이었다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인문학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뜻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포기했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인문학 연구의 최후의 보루는 대학이다. 그런데 대학은 인문학을 버렸다. 전국 대부분 대학은 현재 인문학과 사회과학분야의 통폐합, 혹은 교원 수 줄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대학의 인문계열 졸업자의 취업률은 꾸준히 떨어지고 있으며, 관련 학문분과의 정부 프로젝트는 규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구론’(인문계 졸업자 구십 퍼센트는 논다)과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소리는 학부 졸업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연구를 업으로 삼아 공부 중인 전국의 모든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연구자에게 당장 내일은 어떨까? 여기서 질투가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의 ‘열풍’이 사회적으로 불어왔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을 위로하던 TV 속 예능 인문학은 알아둬 봐야 ‘쓸데없는’ 지식을 ‘신비’하다는 이유로 3년을 이어갔다. 국경‘선’을 넘어가며 역사전문가라는 사람의 ‘얕은’ 설명과 함께 연예인들이 공짜로 세계여행을 다니더니, 랜선 인문학을 표방하며 ‘틀린’ 지식을 ‘그랜드 마스터’의 입으로 떠들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칼로 자른 듯한 평면적인 얄팍한 수준의 지식전달은 ‘쉽고 대중적인 지식전달’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되었다. 에듀테이너, 전문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명함은 전달자에게 권위를 부여했고, 사람들은 그 권위에 기대어 돈을 지불했다. 지불받은 돈은 다시 비슷한 류의 지식(이라고 보기도 힘든)을 재생산하여 출판, 소셜미디어 등의 영역에 확장 판매했다. 부러웠다. 돈을 써가며 전문지식을 생산하는 사람, 반면 돈을 벌며 권위자로 포장되는 사람 간의 간극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지와 상관없이 질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자, 이제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생각해보자. 이 질투를 정말 그냥 푸념으로 넘겨야 할까? 여기서 질투가 비판으로 성장했다. 이건 개인의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문제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쩌면 대한민국 지식생태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일지 모른다. ‘역사 대중화’라는 괴담논의의 무게를 ‘역사’라는 학문으로 좁혀보자. 얼마 전 이 분야에 설민석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은 설민석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대중매체에서의 역사유통 방식에 있다. 진짜 문제는 ‘역사 대중화’라고 불리우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현상이다. 이 괴이한 현상은 어쩌면 신기루일지 모른다. 아니 괴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역사 대중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대중매체에서 유통되던 ‘역사서술’에는 역사학의 근원적 가치, 더 넓게는 인문학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빠져있다. “왜?”라는 질문과 “정말?”이라는 의심이다. ‘앙꼬없는 찐빵’이 찐빵의 대명사가 되어 팔려 나갔던 이 현상은 그야말로 괴담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TV 속에서 유통되는 역사콘텐츠는 대부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역사서술의 핵심에 민족 정체성을 둔다. 전 시대사를 막론하고 한반도의 모든 역사를 ‘위대한 우리 조상’이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응집시킨다. 대중매체는 콘텐츠를 팔기 위해 역사의 중요성을 포장하여 대중에게 설득해야 했다. 그 설득과정에서 문제를 양산했다. 가장 단순하고 먹히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국뽕’은 치트키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포맷이다. TV 속 역사는 이를 벗어난 적이 없다시피 했다. 이토록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에 무슨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의심을 하려거든 매국노가 되어야 한다. 확실한 치트키가 하나 더 있다. 명확한 이분법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방법이다. 역사적 평가에 있어 선악 구도가 명확해지는 순간 이야기는 쉽고 간결해진다. 듣는 사람도 골치 아플 일이 없다. 마치 사방으로 뻗어있던 물줄기가 드라마틱하게 하나의 맥락으로 대동단결하여 거대한 강물로 몰리듯이 시원하다. 이러다가는 낙동강과 대동강도 한강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다. 이것이야말로 ‘한강의 기적’이다. 덕분에 콘텐츠의 내용은 대단히 단순하게 전개된다. 1.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루면서 개별적 사실을 훑는다.2.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하고 평가한다. 여기서 선악의 기준은 명확하다. 명확한 선과 악으로 구분된 사실관계는 역사적 해석이나 시대적 맥락이 고민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역사는 ‘나’라는 개인과 구분되어 ‘한민족’, 혹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단으로 수렴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국민 만들기의 충실한 개가 된다. 역사학에 있어 역사적 사실은 학문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다. 더불어 역사학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시대를 조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선함=독립운동=임시정부’ vs ‘악함=친일파=반임정’이라는 프레임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관련 연구가 시작된 이래 근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식민지 연구의 다양한 갈래들은 완벽히 무시된다. 그러나 역사학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다양한 연구 방향으로 증명된다. 연구의 다양한 갈래는 “왜?”라는 물음과 “정말?”이라는 의심이 낳았다. 이 질문과 의심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역사 속 주인공은 다양할 수 있음을 말해주었고, 나도 역사의 일부라는 동질감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국가와 민족이 아니어도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개인의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연구로 증명되었음에도 TV 속 역사에는 나라는 개인에 대한 성찰이 없다. 문제는 유통에 있을지도 모른다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친일과 독재라는 나쁜 프레임을 하나 두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좋은 프레임을 두고 과거를 정리하면 유통과정에서 편집은 단순해진다. 전달력도 뛰어나다. 사람들은 속 시원함과 더불어 단순하게 정리된 사실관계에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다. 찐빵인 줄 알고 샀는데 누텔라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게 너무 맛있네? 소비자는 굳이 컴플레인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서술했던 것처럼 역사는 그렇게 정리되지 않았고, 역사의 근원적 가치도 이러하지 않다. 이걸 설명해야 한다. 어렵다. 머릿속에 두 개의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역사상을 설명해주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가 처음부터 다시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Too Much Talker다. 어쩌면 타고난 운명이다. 학문이 그러하니까. 역사는 다양한 정보 안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사람들이 지금 당장 관심이 없더라도 절대 짤려서는 안되는 ‘편집점’이 존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긴 호흡의 이야기를 전달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아쉽지만 대중매체는 이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앞뒤 관계의 맥락과 분석은 사라지고 “쓸데없”는 단편 지식만이 남는다. 역사학의 저변 확산이라기보다는 ‘휘발’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은 역사의 다양한 갈래를 궁금해하지 않을까? 정말 휘발되어 없어지는 단편적 지식에만 관심을 둘까? 애초에 그걸 누구 마음대로 판단했을까? 우리는 정녕 (책을 제외하고) 긴 호흡으로 역사학의 근원적 가치를 잃지 않은 콘텐츠를 생산해봤을까? 지금까지 ‘국뽕’, ‘선악구도’가 먹혔으니 관성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닐까? 물론 콘텐츠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새로운 도전이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과감한 시도는 필요하다. 여기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다.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특강>이 연간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가장 라이벌 관계에 있던 책의 정체다. 바로 <총균쇠>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껴있었다. 중학교 교과서 수준의 역사상식을 나열해 놓은 책과 일종의 전문서적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극단에 선 현상이다. 사람들은 정말 쉽고, 간단하고, ‘국뽕’에 차오르고, 그저 재밌기만 한 지식을 선호할까? 사람들은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미디어가 사람들을 너무 저평가해왔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눈높이는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높아져 있을지 모른다. 지식사회 특유의 엘리트주의와 익숙한 포맷만을 찍어내듯 양산해 낸 매스미디어가 단단히 결합되어 역설적이게도 단호히 서로에게 선을 그었다. 이제 제대로 된 유통을 해야 한다. 대 화합의 시대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자. 어떻게든 많이 팔아야 하는 자, 어떻게든 역사학의 가치를 지키고 싶은 자의 대화합이다. 모든 연구자가 본연의 필드를 벗어나 미디어 속으로 전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문 유통의 길이 새롭게 열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어쩌면 죽어가는 학문 생태계를 살릴 기회임과 동시에, 왜곡되고 단순화되어 소비되던 역사를 살릴 기회일지도 모른다. 대화합의 시대를 기다리며마무리라도 아름답게 가보자. 끝으로 주목해봐야 할 긍정적인 신호가 있다. 바로 사람들이 인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믿는 국민이 68.4%에 달했으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판단하는 국민이 27.7%였다. 일단은 이 통계를 의심하지 말자. 그래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건강한 지식생태계의 부활과 제대로 된 역사의 유통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큰 장벽을 넘어야 한다. 연구를 업으로 삼는 사람의 자존심이다. 역사학을 공부한다는 자긍심과 함께 높게 평가된 스스로의 가치는 가난한 연구자가 끈덕지게 연구할 수 있는 버팀목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외면받는 학문을 한다는 현실의 무게감을 동시에 느낀다. 때문에 TV 속 역사콘텐츠를 대하는 감정은 매우 복잡하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학문의 기본을 잃은 유통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다. 때문에 대화합 이전 연구자의 입장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는 학문을 직접 생산하는 연구자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도매상 없이는 소매상도 없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설민석류의 지식소매상도 없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둘째는 콘텐츠 생산 과정에서의 최소한의 편집권이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편집되어서는 안 된다’는 권리가 필요하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질문과 의심, 그리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맥락이 있다는 뜻이다. 연구자의 나름 강고한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구자에 대한 시선은 ‘엘리트주의’에 쩌든, 고고한 척 자존심만 내세우는 존재라는 시선이다. 어쩌면 비판을 넘어서 혐오의 시선으로까지 번져있다. 대중적 글쓰기에는 관심이 없는 “오만과 무능력”한 자들, “공감” 할 수 없는 글을 쓰고 “도태”된 자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구자라는 자들이다. ‘연구자의 언어’와 ‘대중의 언어’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본질적으로 연구자는 ‘대중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더욱 곪아 있었다. 뼈아프다. 대화합을 입에 담기 위해 연구자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이 고민 없이는 대화합은 고사하고 생태계 부활을 위한 도전은 시도조차 할 수 없어진다. 결국에는 다시 비판자로만 남게 되어 버릴 수 있다. 지금도 아무도(심사위원 3명을 제외한) 읽어주지 않는 논문을 쓰기 위해 골방에서 인문학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은 양질의 논문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별거 아닐 수 있는 논문들이 모여 종국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한편에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고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한마디의 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곧 사회를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믿음, 그리고 종국에는 ‘나’라는 개인을 성장시키는 한마디 말이라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이 둘을 만나게 할 건강한 생태계를, 유통망을 만들어야 할 때다. 대화합으로 말이다. ASK ALL 편집장 금강경ㅣ다물어클럽에서 콘텐츠 기획과 영상에 종종 출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