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진리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모든 질문이 있는 곳, Ask All.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배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넘어서기 힘든 장벽으로 다가옵니다. ‘Ask All’은 그 벽을 허물어 주는 첫걸음이 됩니다. 가볍게 읽는 일주일 한 편의 글로 인문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매주 한 편의 인문학 뉴스레터 받아보기(클릭) 설민석의 이집트사 강의 오류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된 후, 재즈 강의에 대한 오류 문제도 나오면서 그의 전문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대체로 언론이나 일부 전문가들이 설민석에 대해 내리는 비판의 요점은, 그가 전공자가 아님에도 무리하게 강의의 영역을 확장하다가 결국 많은 거짓 정보(팩트 오류)를 제공하게 됐고, 이것은 결국 ‘예견된’ 참사였다. 뭐 이런 식이다. 언론과 일부 비평가들이 주로 비전문가의 역량 부족이 불러온 문제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설민석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설민석 만큼 재미있게 강의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런 실수야 노력해서 없도록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거기에 설민석은 ‘벌거벗은 세계사’프로의 오류에 대해서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말씀들 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여기고, 더 성실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한마디로 앞으로 더 철저히 준비를 해서 다시는 사실 관계의 오류로 인한 논란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렇게 설민석이 납작 엎드리는 가운데 방송은 예정된 강의들을 그대로 진행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의 예능 강의를 계속 듣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치 인기 연예인이 예능프로에서 저지른 실수로 논란이 일자 고개 숙여 ‘반성’하고 곧바로 해당 프로에 복귀하는 것처럼. 나도 술자리에서 다른 전공자들과 같이 얘기하다보면 특히 설민석의 한국사 강의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 뭐 사실 관계 틀리는 거야 예전부터 지적된 문제니까.’ 하지만 과연 설민석의 문제점이 단순히 팩트 오류뿐일까. 그 자체도 전문성을 지향하는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더 크게 주목해야할 점은 설민석의 강의가 지향해온 것, 즉 그의 강의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가 갖는 사회적 해악이다. 설민석의 강의는 예능 프로의 숙명이겠지만, 소비 위주의 강의, 즉 사람들이 익숙한 주제를 선정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방향으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대중들에게 익숙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는 가운데, 마지막 결론부에서 ‘올바른’ 역사관을 강조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식으로 강렬한 마무리를 장식한다. 나는 이런 형태의 ‘내러티브’를 대학 수시면접에서 수도 없이 목도했다. 어린 학생들은 학업계획서 내지는 자기소개서의 맨 앞, 혹은 맨 뒤에 그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를 매번 인용한다. 그리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역사 주제로 주로 일제 강점기의 종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 강탈당한 한국 문화재의 반환 문제를 든다. 대부분 이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들 틈에서 그들의 역사왜곡에 분연히 맞서야만 하는 ‘약소국’인 한국의 상황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점, 주변국이 제시하는 논리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이를 논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등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여 그 ‘올바른’ 역사관을 전달하는 ‘첨병’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 자네가 존경하는 역사가는 누군가?”“설민석이요.” 이게 어찌 어린 학생들의 잘못이겠는가. 가르친 어른들 잘못이지. 일제 강점기가 끝난 뒤로 8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기성세대가 만든 국민교육 체계와 획일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위와 같은 ‘올바른’ 역사관의 강요가 지속되었다. ‘인문학’으로서의 역사학 본연의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역사란 현재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사회․외교적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다. 역사 전공자는 당연히 ‘우리’에게 유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복무해야 하는 존재이며, 어린 학생들은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주장’에 대한 대응논리를 달달 외워서 읊으면 훌륭한 역사관을 가진, ‘미래의 역사가’처럼 추켜세워졌다. 일선 학교, 그리고 언론에서도 그것이 마치 우리 역사교육의 지향인 것처럼 흔히 다뤄왔으며, 각종 국가기관과 박물관 등에서도 공모전을 통해 비슷한 주제 선정을 반복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사고의 획일화를 강요해오지 않았던가. 만약 그런 관점을 토대로 학생들에게 ‘올바른’ 답변만을 강요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역사교육’인가, 아니면 ‘정신교육’인가. 인문학으로서의 역사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번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역사학의 특징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더불어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사회’의 성향과 진행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과 갈등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강요되어온 각종 가치관․이데올로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갖는 것, 한마디로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역사교육 본연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당신 주변에서 끊임없이 ‘올바른’ 역사관을 강요할 때, 그것이 반공이든, 과도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념이든 간에 이를 객관적으로 보고, 스스로 중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학문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다. 설민석의 역사 강의에는 ‘역사학’이 없다. 그의 강의에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해 역사학에서 논의되는, 인문학이 지향하는 메시지가 없다. 또 그런 논의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전달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결국 그는 역사학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사료와 사건의 ‘창고’ 속에서 사람들이 듣기 거북하지 않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지식’․‘스토리’만을 뽑아서 쏟아냄으로써 기존에 다수의 대중들을 지배해오던 구태의연한 사회적 정서와 고루한 인식체계에 편승한, 말 그대로 ‘예능’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지금 시점에서 설민석의 자잘한 팩트오류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한가. 오히려 설민석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그를 ‘한국사 대가’니, ‘그랜드마스터’니 하는 호칭으로 어린 학생들 앞에 내세우고, 마치 역사에 대단한 권위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여 인문학을 가장한 예능 프로와 책들을 만들어온 ‘어른들’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가짜 ‘인문학’ 간판을 내세우고 돈 되는 예능프로그램을 양산해 온 방송․출판 관계자들이 ‘설민석’이라는 거대한 ‘브랜드’를 만들어왔던 것 아닌가.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멘토’에게 일반 대중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몰려간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수준이 그렇게 수년, 혹은 십수 년을 퇴보해간다. 한편으로 한국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설민석이라는 존재를 지적할 때마다 갖는 자괴감이지만, 매번 전공자들이랑 설민석에 대한 비판이 끝나면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이 엄습해온다. 열심히 설득되어 설민석이라는 ‘멘토’가 마음속에서 사라진 학생들이, ‘그럼 한국사 관련해서는 무슨 책 읽어야 돼요?’, ‘교수님들이 쓴 책은 왜 그렇게 어려워요?’라는 질문들에 전공자들은 웃음기가 싹 가신다. 솔직히 서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는 전공자가 쓴 권위 있으면서도 술술 읽히는 책들도 적지 않은데, 왜 우리는 중․고등학생들한테 제대로 추천할 책이 몇 권 없을까. 역사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그 수요를 제대로 읽어내고 거기에 부응할 능력을 제대로 못 갖춘 것이 현실이다. 전국의 대학에서 사학과가 점점 줄고 있는 현실은 단순히 인문학의 숙명일까. 사학과 학생들은 졸업 후 진로를 제대로 설정 못해서 우왕좌왕하다가 공무원 시험으로 쏠리는데, 학과 교수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학과의 커리큘럼도 거의 바뀌질 않는다. 연구자들은 그저 국가에서 내주는 얼마 안 되는 연구지원금에나 매달리고, 마치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전공자들은 이전의 연구자 중심의 사고체계를 못 벗어나고 있으면서 대중역사가들의 무모한 시도에 ‘팩트체커’로 나서서 ‘지적질’하는 능력밖에 없는가. 그렇게 잠시 동안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거에 의기양양해하는 거야 좋지만, 필연적으로 물어오는 ‘대안’이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당장 설민석이 강의에서 틀린 사료를 제시했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연구자들이 제대로 된 컨텐츠를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에 더 분개해야 않는가. 제2, 제3의 ‘설민석’이 대중들을 상대로 지금 시대에 역행하는, 인문학 본연의 목적에 역행하는 ‘퇴행적’ 강의들을 쏟아낼 때, 이러한 흐름을 돌이키고 그의 ‘대체품’을 만들어낼 생각도 해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전문 연구자는 ‘지식’을 생산하고, 중간에서 연구결과를 좀 더 쉽게 풀어내 다양한 컨텐츠로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중간도매상’ 혹은 ‘지식소매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연구자들이 학술 저서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누군가가 이를 열심히 공부해서 대중들에게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이상적인 ‘협업’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구상은 아니다. 이미 근대 역사학이 한국에 성립하면서부터 존재했던 ‘전통적인 연구자’상을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지식이 보급되는 선순환 과정을 언급한 것 아닌가.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중간도매상’, ‘소매상’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현실화된 적 있는가. 오히려 전문 역사학과 대중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최근까지 이덕일․설민석․김용옥 같은 사기꾼, 혹은 역량 미달의 사람들이 대중들 앞에 부각되어왔던 것이 현실 아닌가. 그 책임은 온전히 현자(賢者)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식한’ 대중들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대안을 내지 못한 연구자들의 무관심과 방치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모두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 때문이라고 해야하는가. 사람은 각자 가진 재주가 다르다. 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교육과 연구 업무에 매여 사는 상황에서 모두 설민석과 같은 ‘예능인’이 되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다. 다만 전문 연구자들 역시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역사학에 대한 다양한 ‘수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가운데, 미력하나마자기 나름의 부응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 예컨대 수십 년째 바뀌지 않는 전공자 양성 중심의 학부 커리큘럼을 사회적 수요에 맞추어 일부 수정해보는 건 어떨까. ‘괜한 논란거리는 싫다’고 꺼리지 말고 교양강의 내용들을 좀 더 시사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주제와 내용으로 고쳐보면 어떨까. 요즘 학생들이 책을 읽기 싫어한다면, 구질구질한 감상문 리포트 과제 대신 영상 제작과 발표를 권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실험적인 노력들을 통해 학생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들과 공감하면서 ‘수요’를 읽어내고 ‘대안’을 만들다보면 자신이 대중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최근 다양한 전문지식들이 소비되는 방식과 유형에도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전공자들에게 다양한 사회적 수요를 읽어내고, 그 시장을 스스로 나서서 개척해보라는 요구가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흥행성’이 보장되지 않은 전공자들에게 애써 연락하고 그런 진출로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가 있는 게 현실인 상황에서 ‘이미지’나 ‘체면’ 따지지 말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데 너무 인색하지 말자. 유튜브 등에 검증되지 않은 ‘싸구려’ 역사 지식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이에 대한 ‘비판자’․‘검증자’ 역할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대체품’을 만들고, ‘발언대’를 하나둘 만드는 노력들을 해보자. 미국이나 서유럽 쪽에서는 전공자들이 영화․다큐 등 다양한 컨텐츠 제작에 진출해서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역사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대중들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정서가 문제가 있다면, 이를 가장 잘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전공자들이 아닌가. 과거의 ‘전통적인’ 역할과 위엄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자기 지식이 전달되는 통로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정준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